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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사건 안의장터 3·1운동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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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431회 작성일 11-09-21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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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장터 3·1운동 만세시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이전리 13-4~석천리 243)

1919년 3월 31일 전병창·임채상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곳

안의에서의 3·1 만세시위는 최초 수동면 상백리에 사는 고재경(高哉景)·정재원(鄭在元)이 주도하였다. 3월 25일의 안의장터에서의 의거를 계획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할 것이니 뜻있는 자는 3월 25일 안의장으로 나오라고 방을 써서 상백리 주막집 앞길에 붙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 군경의 경계가 심하여 거사하지 못했다.

그후 유지 전병창(全炳昌)·임채상(林采尙)·정순완(鄭淳完)·전재식(全栽植)·조제헌(趙濟憲) 등은 보산리 급천서당 청년학생 김채호(金采鎬), 금천리 최석룡(崔碩龍) 등과 안의장날 의거를 계획하고 거사 일을 3월 31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드는 등 의거 준비를 서둘렀다.

3월 31일 안의장날 주도 인물들은 준비물을 감추어 장터로 잠입하였다. 오후 1시 경 전병창·임채상·정순완·전재식·조제헌의 5명은 장터 복판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려는 순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오후 2시경 최석룡이 태극기를 다시 만들어 와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어,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군중들은 오후 7시 경까지 장터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벌이고, 연행한 주도인물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 군경이 거창수비대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거창에서 지원군이 온 뒤에야 겨우 군중을 해산시켰다.

새 건물들로 시장을 정비하여 원형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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