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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원사(靈源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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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349회 작성일 11-08-0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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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사(靈源寺) 


요약


영원사는 신라 경문왕 때 영원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은 없는 형편이다. 고승들의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組室案錄)에 따르면, 부용영관(芙蓉靈觀), 서산대사, 청매(靑梅), 사명(四溟), 지안(志安), 설파 상언(雪坡 常彦), 포광(包光) 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비록 문화재는 현전하는 것이 없지만 조선 시대의 손꼽히는 선방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련설화
영원사에는 영원조사와 영원사 인근의 ‘황소목’과 관련된 설화가 두드러지는데, 두 종류의 설화에서 등장하는 영원조사는 신라 시대가 아닌 조선 시대의 승려이자 또한 창건주로 전해지고 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인지 혹은 전승되어 오던 설화가 기록되는 과정에서 시대가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종류의 설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연기조사와 그 스승이자 제자인 명학(혹은 매학)과 얽힌 인연으로서, 구렁이 모티프를 이용하여 점조사와 그 제자 등의 주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연기조사와 관련한 설화에서는 스승이 자신의 과실로 인해 구렁이로 변하는데 비해, 지명설화에서는 스승의 말을 어긴 영원조사 때문에 스승이 구렁이로 변하게 된다. 전자가 인과응보를 드러내기 위한 모티프로 차용되었다면, 후자는 낚시 이야기와 더불어 영원조사의 각성 계기를 드러내기 위한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재에 맞춰 변형되는 설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번갈아 드는 생
임진왜란 당시 부산의 동래 범어사에 노스님이 한 분 살고 있었다. 그의 법명은 명학이라 했다. 명학스님은 평생을 재물 모으기에 힘썼다. 수도는 뒷전이었고 신도들의 시주가 들어오면 대중들에게 베풀기보다 늘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런 그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가 숨어 있었다. 하루는 소산 앞을 지날 때였다. 소산은 조선의 의병들이 왜적을 막기 위해 진을 치고 있던 마을이었다. 그는 마침 한 초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고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옷깃을 여미며 집 앞에 이르자 안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앙, 으앙, 으앙.”
옥동자가 태어난 것이다. 명학스님은 문밖에서 애기 울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방안을 항해 소리쳤다.
“축하합니다, 시주님. 옥동자를 낳으셨군요. 그런데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아이입니다. 잘 기르십시오. 소승이 10년 뒤에 데리러 오겠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남정네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 여인은 특히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아이라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물었다.
“누가 오셨습니까?”
“예, 빈도는 범어사에서 사는 비구 명학이라 합니다.”
“그런데 어인 일이 신지요. 그리고 제 아이가 부처님과 인연이 깊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습니다그려.”
“그렇다면 당연히 부처님께 바쳐야만 하겠지요. 허나 피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까?"
“이는 전생부터의 인연이라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온데 언제쯤 데리러 오신다구요?”
“예, 10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임진란도 이미 끝이 났고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건국 초기부터 있어 온 당파싸움은 임진란이 있을 때에 좀 가라앉은 듯 하더니 다시 이어졌다. 게다가 스님네는 마음 놓고 저잣거리를 나다닐 수도 없었고 탁발하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도 명학스님은 전에 약속했던 아이를 데리러 갔다. 하지만 10년 전의 약속과는 달리 남편이 반대하므로 난처하다고 했다. 명학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범어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웬, 동자 하나가 명학스님 방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명학스님이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아이냐?”
동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스님께서 절 데리러 오신다고 했던 명학스님이시지요? 하지만 전 제 힘으로 왔습니다.”
“제 힘으로 왔다?”
명학스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문득 오조홍인 문하에서 법을 받아 나오는 육조 혜능을 생각했다. 육조가 오조에게 말했다.
“깨닫기 전에는 스님께서 저를 건네 주셨지만 이제 깨닫고 나서는 제가 제힘으로 자신을 건네겠습니다.”
명학스님은 이 동자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느꼈다. 그는 동자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왔느냐?”
동자가 대답했다.
“신통으로 왔습니다.”
점입가경이었다. 명학스님은 내심 놀라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신통이라면 축지법을 말하는 게냐? 아니면 둔갑술을 뜻하는 게냐?"
동자가 대답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조용하고 앉고 서고 가고 누움이 모두 신통인데, 스님께서는 하필 축지법과 둔갑술을 말하십니까?”
명학스님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일상적 신통이란 말이지. 그래 어디 한번 신통을 보여 주지 않겠느냐?”
동자가 문득 삼배를 올리고 나서 명학스님 앞에 차수를 하고 말했다.
“이미 신통을 보여 드렸습니다, 스님.”
명학스님은 그를 상좌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방광이라 법명을 지어 주었다. 방광은 스님의 잔심부름을 비롯하여 조석의 예불도 곧잘 모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학스님은 방광을 시켜 땔나무를 해 오라고 일렀다. 땅거미가 어둠에 묻히고 나서야 방광은 돌아왔는데 빈 지게였다. 명학스님이 물었다.
“나무하러 간 녀석이 어찌하여 나무는 안 해 오고 빈 지게만 지고 돌아왔느냐?"
“스님, 도저히 나무를 벨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낫으로 나무를 찍으니 찍히는 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며 식은땀을 흘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왔습니다.”
“아니, 이런 녀석이 있나. 나무가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지르며 식은땀을 흘린다고? 내 60평생을 살았다만 너처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녀석은 처음 보았다.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어험.”
그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명학스님이 방광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명학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바위를 두드리며 앉았노라니 방광이 다가와 말했다.
“스님께서는 바위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십니까?”
“뭐? 바위가 비명을 지른다고?”
“언젠가 스님께서 제게 일러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삼리만상이 모두 스승이시라구요. 한데 지금 스님께서 바위를 두드리시니 바위가 아프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명학은 방광을 이길 수가 없었다. 산책을 그만두고 돌아온 명학스님은 방광을 앞에 앉혀 놓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너를 지도할 수가 없구나. 더 큰 스승을 찾아 떠나거라.”
그리하여 방광은 명학스님 곁을 떠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금강산 영원동에서 세속과 인연을 완전히 끊고 오직 한마음으로 정진하기를 15년. 그는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영원동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영원’이라 스스로 호를 붙여 영원스님이 된 것이다. 영원스님은 다시 3년 동안 영원동에서 보림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선정에 들어 법열을 만끽하고 있는데 홀연히 염라국이 나타나고 거기서범어사의 옛 스승 명학스님의 죄목을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이 명학이가 맞더냐?”
염라대왕의 물음이었다. 명학스님이 우물쭈물 대자 다시 호령이 떨어졌다.
“다시 묻겠다. 맞느냐, 틀리느냐?”
“맞습니다. 명학이라 불렸습니다.”
“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어험. 너는 인간세상에서 선한 일이라곤 조금도 한 일이 없었고 오직 탐심으로 재물 긁어모으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실이냐?”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이런 못된 자를 보았나. 너는 그 죄로 구렁이 몸을 받으라.”
판결은 끝난 모양이었다.
억울하다 부르짖는 스승의 비명을 들으며 선정에서 깨어난 영원스님은 부랴부랴 행장을 꾸려 범어사로 향했다. 범어사에 도착해 보니 큰 구렁이가 골방에 서리서리 또아리를 틀고 팥죽을 먹고 있었다. 범어사 대중의 얘기로는 이 구렁이가 팥죽을 잘 먹기에 늘 팥죽을 쑤어 대접하곤 했다는 것이다.
“명학스님께서 열반하신 지 얼마나 됩니까? 오래는 안 되셨지요?”
한 스님이 대답했다.
“예, 이제 오늘이 열흘째입니다.”
“그럼 이 구렁이가 여기 있은 지는 며칠이나 됩니까?”
“예, 오늘로 한 파수가 됐지요.”
영원스님이 가만히 손가락을 꼽으면서 계산해 보니 자기의 옛 스승인 명학스님의 업보신이 틀림없었다. 영원스님은 구렁이가 팥죽을 다 먹기를 기다려 공손하게 구렁이 앞에 큰절을 올렸다.
“스님, 어찌하여 이렇게 되셨습니까? 어서 해탈하시어 승천 하옵소서.”
영원스님이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구렁이도 또아리를 풀고 따라 나갔다. 시냇가에 이르러 영원스님이 말했다.
“스님께서 이런 몸을 받으신 것은 전생에 탐욕스런 마음으로 재물을 긁어모을 줄만 알았지 베풀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스님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일반대중이나 재가불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부디 모든 인연을 놓아 버리시고 집착하지 마옵소서.”
말을 마치자 들고 있던 석장으로 구렁이를 내리쳤다. 그때였다. 죽어가는 구렁이의 몸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나오더니 영원스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그는 새를 품에 안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품안에 있는 새는 암수의 짐승이 짝짓기를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가리지 않고 날아가 퍼득거리곤 했고 영원스님은 이를 붙잡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져서 더 갈 수가 없어 인가를 찾던 중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영원스님은 새를 주인에게 맡기고 당부하였다.
“이 새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1년 뒤에는 이 댁에 옥동자가 태어날 것입니다.”
“옥동자라고요? 그러지 않아도 결혼한 지 3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주인 내외는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영원스님이 말했다.
“그 옥동자는 부처님과 인연이 아주 깊습니다. 제가 10년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 후 10년이 지난 뒤 영원스님은 이 집을 다시 찾아 사내아이를 데려갔다. 영원스님의 나이도 40고개에 올라섰을 때였다. 그는 동자의 머리를 깎아주고 이름을 학보라고 지었다. 그것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깨치라는 의미였다.
영원스님은 그 후 학보에게 큰절을 올렸다. 학보는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 영원스님이 말했다.
“저는 본디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전생에 명학이라 하셨지요. 그런데 탐심이 많아 구렁이 몸을 받았고 이제 그 몸을 다시 바꾸어 사람으로 환생하신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시고 제 눈을 똑똑히 보십시오.”
그 순간 학보는 비로소 자기의 전생을 보았다. 이미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깨닫고 나서야 스스로 호를 붙여 우운이라 하였다. 우운수좌는 영원스님이 전생에 자기 제자였으면서도 그를 통해 업보의 몸을 벗고 사람으로 환생하여 우운이 되었음을 알고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러나 우운수좌에게는 아직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영원스님이 고맙다손 치더라도 전생에 구렁이 몸을 받았을 때 석장으로 때려 자기를 죽인 원한이 서려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영원스님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우운수좌는 방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도끼가 들려 있었다. 영원스님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미리 앞일을 알고 벽장 속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벽장 문틈을 통해 우운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우운수좌는 살금살금 영원스님의 침상의 곁으로 다가갔다. 침상에는 방석과 베개를 잇대어 놓아 사람이 자는 것으로 알게끔 해 놓았다.
그때였다. 우운수좌는 들었던 도끼를 내리찍었다. 이를 지켜 본 영원스님이 벽장문을 열고나오며 말했다.
“스님, 이제 숙업은 다 해결되었습니다. 어서 도끼를 내려놓으십시오.”
우운수좌는 힘없이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 후 우운수좌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올바르게 깨달아 비로소 우운조사라는 큰스님이 되었다.
한편, 스승을 제도한 영원스님은 전국을 운수납자로 행각하면서 많은 제자를 대접하고 불자를 교화하였다. 나중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에 들어가 절을 세워 영원사라 하였다. 이 절에서 걸승이 배출되었으니 부용선사, 청하선사, 청해선사 등이었다. 그리고 우운스님은 나중에 법명을 진희라 했다. 사미승 때 불렸던 학보라는 이름 대신 우운진희 대사가 된 것이다. 그는 소요태능(1562-1649)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통도사 중창불사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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