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권문화연구단 제16호 소식지 '지리산인2015.05 지리산칼럼 - 지리산 유람록
페이지 정보

본문
조선 지식인의 버킷리스트_지리산유람록

강정화 HK교수(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내가 죽기 전에 가보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경상남도 함양에 살았던 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 1554-1611)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는 올라 보리라. 눈만 뜨면 보이는 저 천왕봉을 언젠가는 한 번 오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만 하다가 평생을 보내고 말았다. 벌써 예순이 코앞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어느 날 천왕봉에 오르겠다고 선포했다.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은 거세게 만류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이 노인네가 노망이 든 게 아니냐는 핀잔도 들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박여량은 천왕봉 유람 계획을 세우고는 매일같이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을 시작하였다. 시간을 정해 매일 일정 거리를 걸었고, 그 거리를 조금씩 늘려가면서 다리의 힘을 길렀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마침내 6박7일간의 산행을 떠났다.
함양 백무동 코스로 등정하여 산청 쑥밭재로 하산하는 일정이었다. 그래도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던 인근의 벗들이 동행하였다. 그런데 웬 걸. 태산 같은 걱정과 달리 모든 일정을 거뜬히 마치고 하산하였다. 1610년 9월 초였다. 박여량은 그 이듬해에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명산 유람은 평생의 염원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하였다. 빼어난 인물은 땅의 신령스런 정기를 받고 태어난다는 말이다.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의 출생 설화에는 명산과의 일화가 빠지지 않는다. 큰 산과 큰 인물은 예전부터 자연스레 그 이미지가 연결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시경(詩經)>에 “높은 산을 우러르며, 큰 길을 걸어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시구가 있다. ‘높은 산’은 태산(泰山)을 가리킨다. 이때의 산은 돌과 흙으로 뒤덮인 자연의 산이 아니라, 높은 덕을 지닌 우뚝한 인물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높은 산’을 우러르듯 자연스레 큰 인물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명산이 지닌 상징이다. 정복해야 할 산이 아니라, 닮고자 우러르고자 한 ‘높은 산’이었다.
명산에 대한 이런 기대는 박여량이 그러했듯, 죽기 전 꼭 한 번은 오르고자 하는 평생의 염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당연히 그 감동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기려 하였다. 일종의 산행기다.
우리나라의 유산록은 고려시대 때 문헌상 처음 등장하였다. 본격적인 산행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루어졌다. 우리 국토에 대한 인식이 발달하고 안목이 높았던 당시 지식인들이 전국의 명산을 유람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대표적 명산으로는 백두산·금강산·한라산·지리산 등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금강산은 경치가 빼어나 많은 이들이 찾았고, 유산록도 가장 많이 남아 전한다. 우리 민족의 최고 명산은 단연 백두산이다. 당연히 산행이 많았을 법하지만, 의외로 백두산은 아주 늦은 시기인 18-19세기에 이르러서야 산행이 시작되었다. 산세도 워낙 험한 데다 날씨가 춥다 보니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조선후기에 백두산을 사이에 둔 청나라와의 국경분쟁이 제기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라산은 두 산에 비해 유람록이 더욱 적다. 산에 오르는 것보다는 험한 바다를 건너 제주에 도착하는 일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이 시기에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었다. 실제 조난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때문에 한라산 유람은 주로 제주도에 부임한 관료나 그곳에 유배된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인복이 많은 산, 지리산
이에 반해 지리산은 우리가 사는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언제든 오를 수 있는 산이었다. 그 품이 워낙 넓어서, 지리산권역 어디서 보더라도 천왕봉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임과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는 ‘내 가까이 있는 산’이었다.
지리산 동쪽의 산청·단성·덕산·진주를 비롯하여 남쪽 권역인 하동·옥종, 북쪽 권역인 함양·남원 일대에는 역대로 수많은 지식인이 세거하였다. 이들이 남긴 지리산유람록은 현재 100여 편 이상이 발굴되었고, 모두 번역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지리산권역 지식인에게 지리산은 가까이 있기에 늘 공경하면서도 쉽게 찾아 나서지 못하는, 그렇지만 언제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친숙한 존재였다. 때문에 이들의 유산록은 지리산 밖에서 평생을 꿈꾸다가 한 번 올라서는 벅찬 감회를 표출하는 것과 달랐다. 지리산에 대한 칭송이나 기대감도 있겠지만, 내 고장에 있으니 오른다는 친숙하고 담박한 표현이 자주 보인다.
지리산권역에 살았으니 한 번 오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지금도 주말마다 천왕봉을 찾는 산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이 사는 자의 특권이랄까. 기록에 의하면, 덕산에 거주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2차례나 올랐고, 남원사람 양대박(楊大樸)은 네 번 올랐다고 한다. 진주사람 성여신(成汝信)은 지리산을 포함해 인근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고, 조선팔도의 방랑자 명암(明庵) 정식(鄭栻)은 지리산 골짜기마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지독한 산꾼이었다.
한말시기에 이르면 동일 인물이 여러 차례 지리산을 유람하는 이런 현상뿐만 아니라,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산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지리산권역에 특히 많은 지식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영남과 호남의 지식인이 회합하여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에 은거하는 대학자를 방문하거나 선현의 유적을 찾아 참배하였다. 그 선현들이 올랐던 지리산 길을 따라 오르며 그들의 정신을 되새겼다. 이들은 지리산 자락에서 지리산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많았으니 발길이 잦았고, 덕분에 기록도 많이 전해졌다. 이는 사람 사는 곳과 인접한 지리산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지금도 지리산에는 그곳을 올랐던 수많은 지식인의 자취가 남아 전한다. 그리고 그들이 올랐던 그 길을 따라 오늘도 누군가는 그 길을 오르고 있을 것이다.

- 이전글지리산권문화연구단 제16호 소식지 '지리산인2015.05 "지리산 유람록 연구의 심화와 확산" 학술대회 개최 15.04.29
- 다음글지리산권문화연구단 제16호 소식지 '지리산인2015.05 대외협력 - HK연구소협의회 공동학술심포지엄 "한국사회가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15.04.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