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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사건 하동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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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852회 작성일 11-09-2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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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319·388 일대)

1919년 3월 18일과 3월 23일, 4월 7일에 하동지역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한 곳

하동군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朴致和, 1880~미상))는 전국적인 3.1만세시위 소식을 들은 후 면장직을 사임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3월 18일 하동읍 장날이 되자 박치화는 태극기를 장대에 달고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하는 군중이 천오백명으로 늘어나며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박치화를 검거하였다. 박치화는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다음 장날인 3월 23일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보면(良浦面) 장암리(長岩里) 일진학교(日進學校) 교원 정섬기(鄭暹基)는 같은 마을의 정성기(鄭成基)와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고전면 성천리 이경호(李璟鎬), 양보면 우복리 정이백(鄭伊伯) 등을 규합하여 3월 23일 하동읍 장날에 수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부분 검거되어 8개월 형을 받고 복역했으나 그 가운데 이경호(李璟鎬)는 복역 중 옥고로 순국하였다.

4월 7일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된 의거가 일어났다.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인 박문화(朴汶和)·염삼섭(廉三燮)·정점금(鄭點金)·전석순(全錫舜) 등이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7일 오전 학생 130여 명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면서 학교를 뛰쳐나와 하동읍 시장을 향하여 구보행진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에 앞장 선 박문화는 진주교도소에서 6개월 복역을 하였다.

장터와 읍사무소를 연결하는 큰 길은 현재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나 당시의 건물이나 장이 섰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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