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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설화 칠불사(七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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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869회 작성일 11-08-1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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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七佛寺)

1) 일곱 왕자와 허황후

가야국 김수로왕은 어찌된 영문인지 왕비 맞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던 신하들은 어느 날 아침 조정 회의를 마친 후 왕에게 좋은 배필을 골라 왕비로 모실 것을 권했다.

“경들의 뜻은 고맙소. 그러나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었고 왕후를 삼는 일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치 마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배와 말을 준비하고 바닷가에 나아가 손님이 오거든 목련으로 만든 키와 계수나무 노를 저어 맞이하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신하들이 바다에 다다르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해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20여명의 신하와 노비 그리고 금은 보석을 잔뜩 싣고 온 배안의 공주는 선뜻 따라나서질 않았다. 이 보고를 받은 왕은 친히 바닷가로 거동, 산기슭에 임시 궁정을 만들어 공주를 맞이했다.

“저는 이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상제로부터 가락국왕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저를 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즉시 이곳으로 보내셨기에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공주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그날로 왕과 공주는 결혼을 했고, 그 해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는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그 후 왕후는 9명의 왕자를 더 낳아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다.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김씨의 시조가 됐으며, 둘째·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수도했다.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왕후와 함께 인도에서 온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보옥선사)이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들을 그리는 모정은 길이 멀면 멀수록 더욱 간절했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다. 산문 밖에는 오빠 장유화상이 버티고 서 있었다. 먼 길을 왔으니 이번만은 부드럽게 면회를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가까이 다가갔으나 장유화상은 여전히 냉랭했다.

“아들의 불심을 어지럽혀 성불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어서 돌아가도록 해라.”

왕후는 생각다 못해 산중턱에 임시 궁궐을 짓고 계속 아들을 만나려 했으나 오빠에게 들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일곱 왕자는 누가 찾아와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수행에 전념했다.

궁으로 돌아와 아들들의 도력이 높다는 소문을 들은 허왕후는 아들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마음을 달래던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월 보름달 빛이 휘영청 밝은 산문 밖에서 장유화상은 전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들들이 이제 성불했으니 어서 만나 보거라.”

왕후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들들은 기척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교교한 못 속에는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왕후에게는 이것이 아들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대가람을 이루니 그곳이 바로 오늘의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지리산 반야봉에 위치한 칠불사다.

김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하여 칠불사라 불리운 이 절은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아(亞)자방(경남 지방문화재 제144호)으로도 유명하다.

절 대부분이 여순반란사건 때 소실되어 최근 중창 불사가 한창인데 불자 화백 손연칠 씨가 요즘 일곱 왕자의 전설을 벽화로 묘사하고 있다.

수로왕이 머물렀다는 ‘범왕부락’, 허왕후의 임시 궁궐이 있던 곳은 ‘천비촌’, 수로왕이 도착했을 때 저자(시장)가 섰다는 ‘저자골’, 어두워질 때 왕후가 당도하여 어름어름했다는 ‘어름골’등 칠불사 인근에는 지금도 이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출전 : 한국불교전설99

2) 영지(影池)의 사연(事緣)

유명한 화개장터에서 20리를 오르면 쌍계사가 나타나고 다시 화개천의 계곡을 따리 10리를 오르면 두 길이 갈라지는 곳이 신흥리(新興里)이다. 오른쪽 길은 의신리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꺾어 계곡을 타고 오르는 길이 칠불사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10리 길을 또 오르면 그 유명한 칠불사가 나타나고 그 입구엔 영지(影池)라는 조그만 연못이 있다. 이 영지는 어버이들과 아들들의 애달픈 사연이 서려 있고 그 크신 부처님의 뜻이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가야왕(伽倻王) 김수로왕(金首露王)에게는 10왕자가 있었는데, 큰 왕자는 김씨(金氏)로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했고, 둘째 왕자는 허씨(許氏), 셋째 왕자는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며 나머지 7왕자는 그들의 외숙인 보옥선사(寶玉禪師)를 따라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한 다음 산음 휴식재를 넘어 의령(宜寧)의 수도산(修道山), 자골산(紫骨山), 사물현(泗勿縣)의 와룡산(臥龍山)과 구룡산(龜龍山)을 거쳐 지리산에 A.D. 103년(수로왕 62년)에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성불하였던 것이다.

가야의 일곱 왕자가 입산수도하고 있을 때 수로왕은 출가한 아들을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더구나, 허왕후의 간절함은 절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사다난한 국사를 제쳐 놓고 아들을 보려고 지리산으로 갈 수도 없었다. 수로왕 내외는 심히 가슴 아픈 나날을 보냈다. 궁중에서 지리산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할 때 찢어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왕과 왕비는 언젠가 한번은 아들들을 보기를 원했고 밤마다 먼 서쪽 하늘만 바라보며 그들의 평안만을 빌기만 했던 것이다.

어느 날 왕 내외는 국내가 안정되고 어려운 일이 없자 아들을 찾아 나섰다. 뱃길을 따라 수백리를 왔고 다시 섬진강(蟾津江)을 따라 150여리를 왔던 것이다. 험한 산 속 인적은 드물고 물소리와 짐승 소리만 울려올 뿐 고요와 적막만이 있었다. 그들은 쉬었다. 그리고는 얼마나 남았는가를 알아 보곤 또 길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산 굽이마다 아들들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왕 내외는 너무나 느린 행열을 탓하기도 했고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가를 생각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칠불사 운산원(雲山院)이 보이는 산모퉁이에서 아들들의 상견을 바라며 사람을 보냈다.

“왕과 왕비께서 뵙기를 원하시오니 왕자들은 마중하라는 대왕의 명이옵니다.”

신하는 크게 자란 왕자들을 보며 우선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왕자들은 기쁜 빛도 슬픈 빛도 나타내지 않고 나직히 말했다.

“돌아가서 전해 주시오. 출가한 자식은 뵈올 수 없으니 그대로 돌아가 주시라고.”

신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왕자들이 왕과 왕비와의 대면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가. 그는 다시 말했다.

“수륙의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오직 왕자님들을 보고 싶어 노심초사 감내하시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이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뜻을 거두시고 뵙길 바랍니다.”

간절하게 신하는 빌었다. 그러나, 왕자들은 한결 같았다.

“우리의 뜻을 전해 주시오. 나무아미타불.”

신하는 돌아와서 왕에게 고했다.

“황고하온 말씀이나 왕자님들이 뵙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왕은 놀랐다.

“무엇이라고 했느냐? 다시 말을 해 보아라.”

신하는 머리를 조아리며,

“왕자님들이 뵙기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돌아가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비가 말했다.

“다시 가 보아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 길을 왔다고 하여라.”

신하는 다시 뛰어갔다.

“뵙기 전에는 돌아가시지를 않겠다고 합니다. 왕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마 발길이 돌아서시겠습니까? 한 번 더 생각하시어 만나 뵙도록 하심이 아들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신하의 간곡한 말이었으나 왕자들은 싸늘했다.

“우리들은 이제 세속의 인연을 끊었노라. 인생은 허무한 것. 모든 것은 인연이요, 모든 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돌아가 아뢰어라. 이곳엔 대왕을 만날 아들은 없다고.”

신하는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모든 것은 공즉시색이라 합니다. 하오니, 만날 아들이 없다 하시면서 돌아가시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왕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에겐 깊은 우수가 얼굴에 나타났다. ‘꼭 얼굴이라도 보아야 한다. 얼굴만이라도’ 그는 신하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공즉시색이라면 또 인연이라면 만나는 것도 또한 같지 않느냐? 가서 상면하도록 전하라.”

신하는 다시 왕자들에게 갔다.

“뵙기를 원하십니다.”

왕자들은 모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신하에게 말했다.

“이미 우리들은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인지라 결코 상면할 수 없는 터이니 부모님께서 우리를 보고 싶으면 모레가 보름날이니 그날 밤이 산 밑에 못이 있으니 그 못을 보시면 저희들을 만나보게 된다 그렇게 전하여 주게나.”

말을 마치고 왕자들은 총총히 사라졌다. 신하는 다시 돌아와 그 말을 왕에게 전했다. 왕과 왕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사흘을 기다려 보름달이 뜨는 밤에 그 연못에 왔다. 그 연못에는 과연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란히 서 있고 빙그시 웃으며 인사를 하지 않는가. 왕과 왕비는 눈물을 흘렸다.

“몸 편히 잘 계셨습니까? 저희들은 부처님의 가호로 아무 탈 없이 무사하였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왕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염려하지 마옵소서. 뜻을 꼭 이루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들은 그토록 연모하던 정을 풀었다. 그래서, 왕이 주련하던 곳을 범왕수(凡王村), 왕비가 있던 곳을 대비촌(大妃村)이라 하고 왕과 왕비와 왕자들이 상면한 연못을 뒷날 영지(影池)라 부르게 되었다.

출전 : 하동군지

3) 아자방 이야기

조선 중엽 하동 군수로 온 정여상이 쌍계사에 초도순시 차 왔다. 쌍계사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 주지스님이 내어 온 녹차를 마시고는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칠불암의 아자방 얘기가 나왔다. 정여상은 쌍계사 주지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칠불암이라는 암자가 있지요? 좀 보고 싶은데요. 참 어째서 칠불암이란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까?”

“예, 그 칠불암은 신라 제5대 바사왕 23년(서력 102년),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출가하여 그곳에서 모두 성불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제가 듣기로는 그 암자에 아자방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좀 유명하지요.”

“어떻게 유명합니까?”

“예, 그 아자방은 방 자체도 크지만 방의 형상이 아자형식으로 되어 있어 아자방이라 합니다. 높이가 12자인데 높은데도 참선하는 스님네가 있고, 낮은 데도 참선하는 스님네가 앉아 정진하지요. 불을 때면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함께 더우며, 한 번 방이 덥혀지면 석 달 열흘 동안 불을 때지 않더라도 방안이 훈훈하다고 합니다.”

정여상은 내심 놀랐다.

“허, 그렇군요. 이거 호기심이 나는데요.”

쌍계사 주지는 군수 정여상이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나서 말했다.

“설계는 신라 효공왕 때(897~912 재위)가 담공선사가 했지요. 참 특이한 온돌식 난방구조입니다. 동양에서는 유일한 대선방이며, 오직 우리 조선에만 있는 유일한 난방구조입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습니까?”

“웬걸요. 거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참선수도 하는 스님네만 입방이 허락됩니다.”

“제가 좀 보려고 하는데 안내해 주시겠소?”

“좀 곤란합니다. 그 아자방은 오로지 참선하는 방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쌍계사는 물론 조선의 모든 사찰들이 아자방만큼은 잘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곤란합니다.”

“그래도 스님이 안내를 좀 하시오.”

하동 군수 정여상은 자신의 권력으로 밀어 부치고 있었다. 스님네는 바로 그 점이 아니꼬웠다. 하지만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대답했다.

“말은 유명하다고 했으나 볼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지요.”

정여상의 낯빛이 약간 변했다.

“나는 이 고을 군수요. 군수가 안내 좀 해 달라는데 그렇게 뻐길 것까지는 없지 않소. 어서 안내하시오.”

스님네는 군수 정여상을 칠불암으로 안내했다. 정여상의 표정에는 거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까짓 중들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는 식이었다. 그는 약간의 승리감에 들떠 말했다.

“내 여기까지 왔다가 그 유명하다는 칠불암과 아자방을 보지 않고 간대서야 말이 되는가, 어험.”

칠불암에 도착한 군수 정여상 일행은 법당 안에 들 생각을 하지 않고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기웃하며 다녔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별로 볼 것도 없구만. 괜스리 야단들이로고.”

군수가 아자방 앞에 이르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이 방이 그 유명하다는 아자방이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문을 여시오.”

“안 됩니다. 지금은 전진중이라 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가능하겠소?”

“예, 이제 막 점심 공양을 끝내고 정진에 들어갔으니 적어도 서너 시간은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무례한 사람들이로고.”

정여상은 눈을 치켜 떴다. 당장이라고 스님네를 징치하려는 듯싶었다. 스님네는 하동 군수 정여상의 눈치만 살폈다. 정여상의 호령이 이어졌다.

“어서 문을 열지 않고 뭣들 하는 게요. 내가 이 고을 성주 정여상이오. 성주가 주민을 보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

정여상은 수행한 나졸들을 항해 소리질렀다.

“너희들이 문을 열어라.”

그때 한 스님이 정중하게 나서며 만류하였다.

“죄송하오나 조정의 영상대감도 그리하셨고 본도의 관찰사도 그리하셨습니다. 옛날부터 규정이 그러하오니 이 방만은 안되옵니다.”

정여상은 삼정도를 뽑아들며 나졸들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느냐, 빨리 문을 열어라.”

나졸들이 달려들어 가로막고 있는 스님을 나꿔채 내동댕이쳤다. 스님은 저만치 나동그라지며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나졸들은 무자비했다. 그중의 한 나졸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때는 마침 늦은 봄이었고, 점심 공양을 끝낸 스님들이 아자방에 들어않아 가부좌는 틀었지만 춘곤증과 식곤증이 겹쳐 모두들 졸고 있었다. 그들 자세는 엉망이었다. 어떤 납자는 천정을 쳐다보고 입을 벌린 채 졸고 있었고, 또 어떤 납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졸고 있었다. 또 어떤 납자는 방귀를 뽕뽕 뀌며 졸고 있었다. 군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껏 공부한다는 중들의 자세가 겨우 이런 것들이었냐?”

군수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언짢아했다. 그는 나졸들에게 문을 닫게 했다. 처음 문을 열었던 나졸이 문을 슬그머니 닫았다. 군수가 돌아서며 독백하듯 말했다.

“요놈들 한번 혼쭐을 내놓아야지.”

나졸들을 거느리고 아자방을 나서는 정여상은 심사가 뒤틀렸다. 정여상은 고을의 동현으로 돌아왔다. 그 후 사흘이 지난 뒤 하동 군수 정여상은 쌍계사 주지 앞으로 서찰을 보냈다.

“그대의 절에 도인이 많은 듯하오. 목마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우리 마을 고을 동헌에서 타고 한 번 놀아 봄이 어떴소. 만일 목마를 잘 타면 큰 상을 주겠소.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고을의 성주를 희롱한 죄로 엄히 다스리겠소이다.”

군수의 서찰을 받아 본 쌍계사 대중들은 당황했다. 살아 있는 말도 타 본 사람이 없을 터인데, 불도를 닦고 참선하는 스님네가 어떻게 목마를 탈 것인가. 그렇다고 그냥 넘길 게재도 아니었다. 쌍계사 큰방에서는 각 암자의 대중들이 모여 대중공사, 즉 회의를 열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쌍계사 주지가 서두를 꺼냈다. 대중들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쌍계사 주지는 답답했다.

“누군가 일단 말을 해 보시지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군수영감의 비위를 거스르면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답답하니 말씀들을 해 보십시오.”

한 스님이 말했다.

“저희들이야 모두 초심납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이 산중에서는 쌍계사 주지스님이 가장 도가 높으시고 어른이시니, 이 일을 감당할 분은 오직 큰절 주지스님이시라 생각합니다만…”

대중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님 말고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군수 영감의 서찰을 받으신 분도 바로 큰절 주지스님이 아니십니까?”

“큰절 주지스님께서 나가셔야 합니다.”

“옳습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찬성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쌍계사 주지는 낭패였다. 동진출가하여 아직 말이라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스님들이 나서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때였다. 말석에 앉았던 열두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미가 나서더니 말했다.

“맡겨 주신다면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스님들은 아무 걱정 마시고 싸리채를 엮어 목마를 한 마리 만들어 주십시오.”

대중들은 어이가 없었다. 어른들도 감당할 수 없어서 쌍계사 주지에게 미루고 있는 판인데 어린 사미동자가 감당해 내겠다니.

“자네가 무슨 재주로 그리 할꼬?”

사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필코 성스러운 아자방을 환난에서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대로 어서 목마나 준비해 주십시오.”

스님들은 하는 수 없었다. 사미의 말대로 싸리채로 목마를 만들었다. 어차피 다른 스님들도 감당치 못할 바에야 자처하고 나서는 사미에게라도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싶었던 것이다.

사미는 절의 나무하는 일꾼인 부목에게 목마를 운반하게 했다. 하동군청 마당에는 동헌 뜰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이미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미가 먼저 들어가 동헌 마당에 섰고 부목이 목마를 짊어져다 동헌 마당에 내려놓았다. 군수인 정여상은 사미를 보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쌍계사에는 그리도 사람이 없더냐? 저 어린 사미가 목마를 탄다고 나왔으니. 그래 사미야, 네가 정녕 목마를 탈 수 있겠느냐?”

사미가 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쌍계사 회상에서는 소승이 가장 어리고 또한 도가 가장 낮습니다. 하오나 제가 반드시 군수님의 소원을 풀어 드리지요.”

당당하고 막힘이 없었다. 정여상은 사미의 그 의젓함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렇다면 좋다. 네가 목마를 타기 전에 물어 볼 말이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느냐?”

“예, 소승이 비록 저희 회상에서 가장 어리고 또한 가장 미약하옵니다만, 말씀만 하신다면 대답해 올리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허, 고놈 참 맹랑한 놈이로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정여상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알았다. 내가 며칠 전 쌍계사 칠불암에 갔을 때 들은 말로는 아자방에는 도인들만 있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앉아 있는 모양새가 영 도인 같지 않더구나.”

사미가 대답했다.

“원, 군수 영감님도, 도인이라고 뭐 특별한 모습이 있겠습니까? 또 겉모양으로만 사람을 판단할 순 없겠지요.”

“하긴 그렇기도 하구나. 그럼 내 네게 묻겠다. 하늘(천정)을 쳐다보고 졸고만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는 것이더냐.”

“그것은 앙천성수관입니다.”

“앙천성수관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네, 하늘을 보고 무량한 별들을 관하는 공부입니다.”

“별은 왜 쳐다보고 관하는고?”

“원, 군수 영감님은 그것도 모르십니까? 위로 천문의 이치를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달해야만 천하만사를 다 알게 되고, 따라서 천상에 태어난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으음! 네 말이 그럴 듯하구나. 그럼, 머리를 숙이고 방바닥을 들여다보며 졸고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

사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예, 그것은 지하망명관이라는 공부법입니다.”

“지하망명관?”

“그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으면 지하의 지옥에 떨어져 무량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지하망명관이란 지하에 떨어져 고통 받는 중생을 어떻게 하면 제도할 수 있을까를 일심으로 관찰하고 숙련하는 공부법입니다.”

“허, 고놈 제법이구나. 그러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전후좌우로 흔들며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며 졸고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냐?”

“예, 그것은 춘풍양류관이라는 공부법이지요.”

“그것은 또 무슨 의미더냐?”

“예, 공부하는 도승은 유에 집착해도 안 되고 무에 집착해도 안 됩니다. 고와 낙, 성과 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중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에 버드나무가 전후좌우 어느 곳으로 흔들려도 마침내 어느 한 쪽에 기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공과 유, 선과 악, 죄와 복 등 어떠한 보응에도 걸리지 않는 관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춘풍양류관의 공부법이라 합니다.”

정여상은 사미의 대답이 이치에 딱딱 들어맞는 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러면 방귀를 뽕뽕 뀌어 대고 있는 중은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고?”

“예, 그것은 타파칠통관이라는 공부법입니다.”

“타파칠통관이라. 거 참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그래 그 뜻은 무엇이지?”

“예, 사람이 무식하기만 하고 고집만 세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뭐든지 제 마음대로만 하려는 사또와 같은 칠통의 무리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법이지요.”

“허허 고놈, 말버릇 한 번 고약하구나. 그래, 잘 들었다.”

사미에게 계속해서 두들겨 맞은 군수 정여상은 앉아 있는 여러 아전과 관료들과 백성들을 돌아보며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너의 식견이 이처럼 논리 정연하고 고매하니 그곳에 있는 도승들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느냐? 이제 더 물어 볼 말이 없구나. 어서 목마나 타보도록 해라.”

사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싸리채로 만든 목마위에 턱 걸터앉더니 고사리 같은 여린 손으로 말의 궁둥이를 후려치며 말했다.

“어서 가자, 목마야. 미련한 우리 하동 군수 정여상 영감님의 칠통 같은 어둔 마음을 확 쓸어버리자. 그리고 그 마음에 태양처럼 밝은 부처님의 반야광명이 비치게 하자꾸나.”

사미가 한 번 발을 구르니 싸리채로 만든 목마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는 스님네는 마음속에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목마는 동헌 마등을 대여섯 바퀴 돌더니 둥실둥실 떠서는 공중으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군수와 육방권속들, 그리고 구경을 나온 온 고을 백성들은 너무나도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스님들은 그 사미가 다름아닌 문수동자의 화현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사미가 목마를 타고 사라져 간 쪽의 하늘을 향해 무수히 많은 절을 올렸다.

한편 군수 정여상은 그 뒤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불심을 발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군수는 쌍계사와 아자방의 스님들을 생불처럼 공경하고 공양하였다. 이쯤 되니 육방권속들을 비롯하여 하동군민은 물론 백성들도 부처님을 신봉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교법이 널리 퍼져 마침내 화장장엄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아자방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1982년에 복원된 것이다.

출전 : 동봉스님이 풀어 쓴 불교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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