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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유적 권석도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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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298회 작성일 11-09-2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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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도 집터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양백리 587)

군대해산 후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권석도가 살던 곳

권석도(權錫燾, 1880~1946)는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이명은 명구(命九)이다.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8월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들어가 고광순(高光洵) 휘하에서 지리산 연곡사와 쌍계사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고광순이 전사하자 의병진을 정비하고 이학로(李學魯)·김경각 (金敬珏)·우수보(禹守甫)·박매지(朴每之) 등과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7년 12월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고 박인환과 의병들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어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 6월 하동군 일대에서 무기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구금 20여 일 만인 7월 9일 하동주재소를 탈출하다가 가슴에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1909년 3월 다시 이학로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동양곡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으며, 5월에는 박매지·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본군 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 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다 1909년 10월 진주에서 다시 체포되어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16년 6월 24일 가석방되었으나, 1918년 2월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1986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지번도와 일제초기 측량한 지적원도를 비교했을 때, 터의 형태는 그대로지만 권석도가 살던 당시의 건물이나 모습들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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