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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유적 황석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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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323회 작성일 11-08-0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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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성

종 목 사적 제322호
명 칭 황석산성(黃石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446,186㎡
지정(등록)일 1987.09.18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산153-2
시 대 고려시대

함양군 안의면과 서하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1,190m의 황석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는 능선을 따라 하나의 계곡을 감싸면서 형성된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위치가 영호남의 관문으로 전라도의 장수, 진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점과 구조로 보아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고 백제와 대결하게 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성으로 성곽의 총 연장은 2.75Km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고쳐 쌓았고 임진왜란 때는 큰 전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으로 되어있고, 문은 동·서·남·북동쪽에 있다. 성 안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엔 성의 둘레가 29,240척(약 8.9㎞)이며, 성 안에는 시내와 군창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현재 성 가운데로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조선태종 10년(1410)에 경상도의 6개의 성을 수축할 때 화왕산성, 조혜산성, 금조산성, 염 산성, 부 산성과 함께 수축한 기록이 있고 성내의 넓이는 34결 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8월에 이르러 체찰사 이원익이 수축과 수성의 명을 받고 안음, 거창, 함양의 3읍 주민을 동원하여 성을 보수 한 바 있으나 격전으로 함락된 곳이기도 하다.

역시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前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의현감 곽준 등이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그 해 8월에 함락되어 500여명이 순국한 곳이다. 이원익은 왜군이 쳐들어올 것을 판단해 주민들과 성을 지켰으나 백사림이 도망가자 결국 함락당한 사연이 있는 성이다. 현재도 성 안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마르지 않기에 전략적으로 가치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으로 쌓은 부분이 섞여 있는데 석축 부분은 자연암반이 노출된 산 위이며, 토석 혼축부분은 일반 능선부분이다. 성문은 동, 서, 남, 북동쪽에 나무로 문루(門樓)를 갖춘 작은 것이 배치되었고 성안 동쪽에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동의 건물지가 보이고 있는데 규모나 위치로 보아 성안의 중심 건물로 추측된다. 축조 수법은 산탁(山托)과 협축(夾築)을 겸하고 있는데 기단부는 산탁 또는 내탁 수법을 쓰고, 윗부분은 협축한 것이 보통이다. 이 산성은 1991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황석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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