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표연말 (表沿沫, ?~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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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연말 (表沿沫, ?~1498)
유형 | 인물 | 이칭별칭 | 자 소유(少游) 호 남계(藍溪) |
시대 | 조선 | 출생-사망 | 1449 (세종 31) - 1498 (연산군 4) |
성격 | 문신, 학자 | 출신지 | 경상남도 함양군 |
본관 | 신창(新昌) | 저서(작품) | 《남계문집》 |
조선 전기의 문신.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폐비 윤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였다. 소릉(昭陵:文宗妃 顯德王后陵) 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미화해 썼다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배 도중 죽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본관 신창(新昌). 자 소유(少游). 호 남계(藍溪). 감찰 계(繼)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당대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 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1471년(성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그 후 1478년 봉교(奉敎)로 재직할 때 신임(新任) 관리로부터 주연(酒宴) 대접을 받았다가 파직되었다. 1482년 복직(復職)되어 1484년 공조좌랑이 되고, 1486년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 ·사간(司諫) 등을 거쳤다. 1486년 문과 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한림의 여러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女樂)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그도 이 자리에 들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이후로 향회(鄕會)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 졌다.
1495년(연산군 1) 응교(應敎)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직제학(直提學)으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였다. 그 뒤 승지 ·대사간을 지냈다.
소릉(昭陵:文宗妃 顯德王后陵) 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미화(美化)해 썼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 10)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경원(慶源)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銀溪驛)에서 죽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유호인(兪好仁) 등과 함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함양(咸陽)의 구천서원(龜川書院),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남계문집(藍溪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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