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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김교적개공신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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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281회 작성일 11-08-0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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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적개공신교서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3호
명 칭 김교적개공신교서(金嶠敵愾功臣敎書)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1점
지정(등록)일 1997.01.30
소 재 지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용평리

조선 전기의 무신인 김교(1428∼1480)가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강순의 비장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되어 받은 교서이다.

김교는 세종 32년(1450)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 6년(1460)에 신숙주의 군관으로 모련위 토벌에 공을 세우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적개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성종 2년(1471)에 어린 성종을 옹립하는데 공이 있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성종 10년(1479)에는 명나라 요청으로 건주야인을 토벌시 출전한 공으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대를 하사받고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 교서는 가로 76cm, 세로 28cm 크기의 명주에 쓴 것으로, 제작연대는 세조 14년(1468)이다.
김교((金嶠) :1428∼1480)는 세종(世宗) 10년에 나서 성종(成宗) 11년에 졸한 조선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고경(高卿)이고, 선산군(善山君)에 개봉 되었으며, 부는 판례빈사사 시로(判禮賓寺事 時露)이다. 세종(世宗) 32년(1450)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3년 (1457) 중시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을 거쳐 부호군이 되었다. 1460년 신숙주의 군관으로 모련위(毛憐衛)토벌에 공을 세워 사복시윤에 초수 되었고, 1467년 5월 부친상을 당하여 충청도 홍주에 내려가 있다가 만포절제사로 기복되었다. 그해(1467)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강순의 비장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 1등에 책훈되었고, 경원도호부사겸 경원신병마첨 절제사가 되고, 오림군에 봉해졌다. 이어 회령도호부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내직으로 들어와 선산군(善山君)으로 개봉되었다. 성종 2년 (1471년) 어린 성종을 옹립하는데 공이 있어 그해 7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다시 지중추부사, 공조판서, 평안도 절도사와 평안도 관찰사 등을 거쳐 다시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시 출전한 공으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은대(銀帶)를 하사받고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졸 하였다. 본 교서의 크기는 가로 76㎝, 세로 28㎝로써 바탕의 재료는 명주이며, 제작년대는 성화삼년(成化三年) (146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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