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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홍서 (鄭弘緖) : 1571~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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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521회 작성일 11-09-2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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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서 (鄭弘緖) : 1571~1648

조선 중기의 학자이신 선생의 자는 극승(克承), 호는 송탄(松灘)이며 현감을 지내 정대민의 아들로서 문헌공 정여창 선생의 현손이다.

한강 정구 의 문인으로서 33세때 일두 선생의 역사적 재평가에 따라 그 후손으로서의 음덕을 입어 현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입어 사직하였다. 그 후 39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능전 참봉을 세 번이나 지냈지만 재직기간은 짧았다.

1628년(인조6)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정에 올랐으며 학문이 넓고 깊어서 한번 읽으면 모두 암기하였고 학문으로서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629년 유곡도 찰방을 받고 임지로 떠나기 전에 파직 당하였는데 그 사유가 장릉 위호를 올리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데 선생이 명에 따르지 않는다고 죄를 씌워 옥천으로 유배를 보낸것이다. 그 후 풀려 나 학정이 되었으나 약 6개월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1624년(인조2) 부원수 이괄 이 반란을 일으키자 분연히 일어나 의거 할 것을 계획하니 정경세(대제학)가 '나라를 위한 마음이 천리를 서로 비친다' 라는 격문을 써서 격려했다. 고향에 돌아와 병자호란을 만나니 남한산성이 적병에게 포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을 향해 통곡하며 여러날 침식을 전폐하였는데 이 때 선생의 나이는 60이 넘었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수동면 남계서원 별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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