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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인물 이후백 (李後白), 1520년∼15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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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11-09-2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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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백 (李後白, 1520년∼1578년)

유형

인물

이칭별칭

자 계진(季眞), 호 청련(靑蓮),

시호 문청(文淸)

시대

조선

출생-사망

1520년(중종 15) ~ 1578년(선조 11)

성격

문신, 학자

출신지

황해도 연안(지금 연백)

본관

연안(延安)

저서(작품)

청련집

1520(중종 15)∼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관찰사 숙함(淑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원례(元禮)이고, 아버지는 국형(國衡)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주(酒)’자가 붙은 이상 상주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1535년 (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李義健)ㆍ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 등에게서 배웠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ㆍ사서ㆍ정언ㆍ사간ㆍ병조좌랑ㆍ이조정랑ㆍ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ㆍ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ㆍ예조참의ㆍ홍문관부제학ㆍ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宗의 妃)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의 합칭)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함안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비리와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정치인이며 선조계의 명신인데 도승지, 대사헌,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을 지내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청백리 안에 녹명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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