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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인물 이지활 (李知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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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453회 작성일 11-09-21 22:45

본문

이지활 (李知活) : 1434~ ?

유형

인물

이칭별칭

자 망기(忘紀), 호 고은(孤隱),

시호 문정(文靖)

시대

조선

출생-사망

1434년(세종 16) ~ 미상

성격

학자

출신지

경상북도 성주군

본관

성주

조선 초기의 충신인 공의 자는 망기(忘紀), 호는 고은(孤隱)이며 문정(文靖)이라는 시호가 내렸고 본관은 성주이다. 1434년(세종16) 성주군 장지촌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비 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외가 부근인 이 곳 함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과 재질로 학문을 배워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문종1년 천거에 의하여 18세의 나이로 지금의 남원시 운봉현감이 되어 덕으로 고을을 다스리다가 1455년(단종3)에 단종임금이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를 갔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관직을 버리고 함양군 백전면으로 이사를 와서 백화당이라는 집을 짓고 산천을 벗삼아 책과 더불어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

이 때 외가가 있던 거창의 박유산(신라말의 학자인 박유라는 사람이 고려의 건국에 불복하여 이 산에 들어와 은둔하였다고 붙여진 산 이름)이라는 산의 내력을 전해 듣고서는 다시 그곳으로 거쳐를 옮겨 망월정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북쪽의 영월에 계시는 단종을 향하여 배례로 문안을 드렸다(훗날 망월정은 모곡리로 이건하였다). 망월정의 월자는 단종이 계시는 영월을 뜻한 것이었으며 이곳에서도 책을 벗삼아 소일하면서 단종임금을 위한 시를 지으면서 애타는 심경을 달랬다

야야상사도야심(夜夜相思到夜深) -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 생각하니

동래잔월양향심(東來殘月兩鄕心) - 기울어지는 달빛만 임과 나를 비추네

차시원한무인해(此時寃恨無人解) - 이 억울한 원한을 풀어줄 사람 없어

고의산정루불금(孤倚山亭淚不禁) - 외로이 산정에 의지하여 눈물 흘리네

마침내 1457년 마침내 단종이 승하하셨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공은 날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술을 마시며 통곡을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박유산 남쪽 기슭에 있고 정부인 문화유씨와 함께 합장하였다. 그 후 1800년(정조24년)에 김종진을 대표로하는 유생 500명이 공이 살던곳에 정문을 세우기를 상소하였고 1813년(순조13)에 후손 이광규가 다시 진언하였는데 1814년에 순조대왕이 함양에 정문을 세우도록 전교하셨다.

1818년(순조18)에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경상도 유림에서 선생에 대한 사당을 세우고자 널리 알려 병곡면 소재지 송평마을에 송호서원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렸으며 뒤에 세종왕자 한남군과 공의 손자인 이지번을 추향하였다. 1891년(고종28)에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하시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24년에는 공이 늘 그리워하던 단종대왕의 위패가 있는 공주 계룡산의 숙모전 동무에 제향되었다. 송호서원과, 숙모전 외에도 공은 성주군 벽진면의 안산서원과 김천시 조마면의 상친사당, 거창군 가조면의 망월정등에 제향되어 있다

또한 공의 사당과 묘소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당시 백전면에 있는 선생의 사당에 왜적들이 불을 질렀는데 처마에서 갑자기 물이 비오듯이 쏟아져 불이 꺼졌다. 다시 불을 지르자 이번에는 새빨간 피가 흘러내려 왜적들이 겁에 질려 불을 끄고 대열을 지어 사당을 향해 절을 한 다음 도망쳤다고 하였으며 또한 공의 묘소에는 날짐승들이 날아들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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