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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고시가 낙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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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댓글 0건 조회 278회 작성일 11-09-2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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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地之源纔濫觴 황지의 근원은 겨우 잔이나 넘칠 정도인데

奔流到此何湯湯 여기까지 흘러와서는 어이 그리 벌창한고

一水中分六十州 한 물이 육십 주를 가운데로 나누었으니

津渡幾處聯帆檣 나루터 몇 곳이나 돛대가 연하였는고

海門直下四百里 해문까지 곧바로 사백 리를 내려가면서

便風分送往來商 순풍을 따라 왕래하는 상인들을 나눠 보내네

朝發月波亭 아침에 월파정에서 출발하여

暮宿觀水樓 저녁에는 관수루에서 자는데

樓下綱船千萬緡 누각 아래 배에다가 천만 꿰미 돈을 실었으니

南民何以堪誅求 남도 백성들이 이 가렴주구를 어이 견디어 내리

缾甖已罄橡栗空 쌀독이야 진작 비고 도톨이밤마저도 떨어졌는데

江干歌吹椎肥牛 강가 정자에서는 노랫소리에 살진 소를 잡는다

皇華使者如流星 나라의 사자들이 유성 같이 지나는데

道傍髑髏誰問名 길가의 해골이야 누가 이름이나 물어보랴

少女風王孫草 왕손초에 소녀풍이 불어라

遊絲澹澹弄芳渚 아지랑이 아른아른 꽃다운 물가에 희롱하니

望眼悠悠入飛鳥 멀리 바라보는 눈에 나는 새가 들어오네

故鄕花事轉頭新 고향의 꽃구경할 일이 이내 새로워졌건만

凶年不屬嬉遊人 흉년은 노니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구나

倚柱且高歌 기둥 기대고 소리 높여 노래하니

忽覺春興慳 문득 봄 흥취 인색함을 깨닫겠네

白鷗欲笑我 백구는 나를 비웃으려 하누나

似忙還似閑 바쁜 듯도 한가한 듯도 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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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자 : 점필제 김종직(金宗直:1431~1492)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공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占畢齋)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으로 밀양 출생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의 부친은 원래 경북 선산 사람이었으나 모친 밀양 박씨와 혼인하면서 장인이 왜국 대마도 싸움에서 전사하자 밀양으로 이사하여 공을 낳았다.16세에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21세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1453년(단종1)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공부를 계속하여 증강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막생활을 하였다.

1459년(세조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성종대왕이 경연을 열어 우수한 인재를 선출할 때 첫 번째로 선출되었다 이로서 정자, 교리, 감찰, 경상도 병마평사 등을 역임하고 성종 초기에 경연관이 되었다.

1473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성리학적 실천윤리로 백성을 다스려 봄가을로 향음례와 경노행사를 실시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의 교육 방법대로 소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 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시를 지어 시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던 공이 시판을 떼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유자광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훗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으며 두류산(지리산)을 유람 유두류록을 남겼다.

함양의 상림숲의『함양을 빛낸 사람들』역사인물공원에 흉상이 2001년 건립되어 있다. 문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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