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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지말아야 할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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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희빈
댓글 0건 조회 1,270회 작성일 14-06-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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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대한민국을 근대화 시켰다??

일제는 한국인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이른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실행하는데 1938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1940년 2월부터는 한국인의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창씨개명(創氏改名) 하게 하고, 한국인을 일본인화하기 위해 그들의 종교인 ‘신도神道‘를 들여와 전국 곳곳에는 ’신사(神社)’를 지어 그들의 조상에게 절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각 가정에도 가정용 신단인 “신붕神棚”을 만들게 하였고, 신사참배를 ‘모든 국민이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으로 강요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의 명산의 정기를 끊으려고 심지어 바다 속에까지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조선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체질 인류학적 연구”를 시행하였다. 당시의 연구 자료를 보면, 한국인들은 머리가 작고 골격이 두꺼워서 뇌 중량이 작기 때문에 야만에 가깝다‘고 하였고, ‘일본인에 비해 동작이 활발하지 못하고, 얼굴 표정이 섬세하지 못하며, 조잡한 음식을 먹는 까닭에 소화기관이 발달하여 진화가 덜 된 미개인종으로 자신들이 통치해야 할 인종으로 낙인찍고 있다. 또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실화가 있다. 1907년 3월 도쿄 박람회에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전시물이 있었다. 한국인 두 명을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전시한 것이다. 일본인에게 한국인들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인 참살 만행은 또 어떠한가?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8백만 명의 한국인을 참혹하게 죽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을 합쳐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1920년 만주에서는 한국인 5천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간도 일대에서 자행된 한국인 학살을 지켜본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라고 탄식하였다. 1923년 일본 관동 지역이 대지진으로 초토화되자 일본정부는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시켜 일본인 자경단으로 하여금 약 2만 명이 넘는 동포들을 처참하게 학살하게 하였다.
또한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른바 ‘마루타’라는 암호로 통하던 생체실험에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731부대가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을 상대로 고속 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생사람의 피를 짜내서 죽이는 실험을 하였고, 사람 몸에 말의 피를 넣어 어떻게 죽는지 관찰하기도 하였다. 또 독가스를 살포하여 얼마 만에 죽는지 실험하고, 페스트와 콜레라균을 주입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생사람을 한증막에 넣고 쪄서 수분을 빼서 죽이는 실험을 감행하고,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고 빵만 먹이면 6~7일 만에 퉁퉁 붓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일본의 생체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 중의 하나이다.
일제 음모의 절정은 1933년 흥아(興亞)연구소라는 특수조직에서 꾸민 경성천도(京城遷都) 공작이다. 일본인 1천만 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킬 것을 계획한 이 공작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쌀 한 톨, 쇠숟가락 하나까지 수탈함으로써 조선 민중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 일제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만들어 호적제를 도입하자 항일 운동가들은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살았는데 1947년 ‘과도법령 11호’를 통해 일제 호적에 등재됐던 국민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함으로써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적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머나 먼 타국에서 목숨을 바친 항일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국민에서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반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자들의 후손들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을 합리화 시키며, 지금껏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나치에 협력한 반민족자 100만명을 체포하여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즉결 처형하였다.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호의호식하며 살던 친독에 있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한명의 친일파도 처형당하지 않고 친일파가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반공을 외치며 민족주의자들을 빨ㄹ갱이로 몰았다. 때문에 어떤 사학자는‘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청산 당했다’라고 말한다.
이병도와 같은 식민사학자들도 해방과 더불어 추방은 커녕 서울대 사학과 초대교수가 되고, 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까지 한다. 주류 학계를 장악하게 된 식민사학자들의 손에 우리나라는 60년간 역사 교육을 맡겨 왔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병도같은 식민 사학자가 우리나라 학계의 주류가 되었을까?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제에 편승한 친일파는 제도권 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2년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한국인 정치가를 물색했고, 그 적임자는 이승만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친미주의자로,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부인도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지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게 된다. 해방직후 친일파 숙청의 건의가 거세게 들어오자 반민족 행위자 특별 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만들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직권으로 1년만에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해버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학자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의 역사학계를 독차지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 역사 파괴 공작은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해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총칼로서는 조선을 잠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역사서를 조작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미명하에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한반도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20여 만 권의 각종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라 버렸다.
1916년 중추원 산하에 ‘조선 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25년에 일왕의 칙령으로 조선사편수회로 개편하고, 16년 동안 무려 100만 엔에 이르는 거액을 투입하여 조선총독부 최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가 총 37권, 2만 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 사료집으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의 역사서”이다. 이렇게 일본에 의해 조작된 역사책을 전국 각 기관에 배포하고, 각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교육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런 역사 말살 정책에 대해 당시 언론은 “우리의 역사를 일제의 손에 내어 주는 것으로 최후의 정신적 파산이다”라고 한탄했다(1925.10.22 동아일보)
우리민족은 지난 역사를 우리 손으로 직접 쓰지 못하고 침략자 일본이 썼다는 것은 한민족 근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일제가 왜곡하고 조작한 역사서가 아직도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 한국사의 주요 역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45년에 우리의 몸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까지도 광복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그들의 주구노릇을 하던 식민사학자와 그 후예들이 독차지하였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눌러앉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아직까지도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면 식민사학자들이 위서라고 주장하는『환단고기桓檀古記』는 어떤 책인가?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신라의 대표적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인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 안함로(安含老,579~640)의 “삼성기三聖紀 상(上)”과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고려 때의 인물,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紀 하(下)”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이었던 행촌杏忖 이암(李喦,1297~1364)선생의 “단군세기檀君世紀” 와 고려 말,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의 충신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었던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北夫餘紀“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던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선생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이 다섯 권의 책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 사서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안함로의 삼성기 상(上)은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고, 원동중의 삼성기 하(下)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사람 이형식의 소장본(이형식의 소장본 단군세기와 백관묵이 소장한 단군세기는 그 내용이 동일하였다고 한다)이었다. 태백일사는 그의 스승이자 항일운동 동지인 조선 말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의 집안에서 전해 오던 것이었다. 계연수는 1897년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그 다음 두 해 동안(1898~1899)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1911년 계연수는, 그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스승 이기(李沂)가 일본에 나라가 병탄된 것에 비분강개하여 1909년 절식(絶食) 자진한 후 계연수는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 관전현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운초 계연수는 항일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마산대,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57세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목과 팔,다리가 다섯 토막으로 잘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당시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그의 시신이 수습되는 광경을 지켜본 14세 소년이 훗날 환단고기를 널리 대중화 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이다.
이암(李喦,1297~1364)과 이맥(李陌,1455∼1528)의 후손인 그는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이던 이관집(李觀楫)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립은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이유립의 부친과 계연수선생이 친했던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함께 광개토대왕 비문도 조사, 탁본하였다)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13세 때(1919) 단학회가 주관하는 교육기관인 배달의숙(倍達義塾)에 들어가 계연수, 이덕수 두 스승의 강의를 들으며 환단고기를 공부하였다. 그 후 독립군의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신간회의 삭주 지부를 결성하는(21세)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단학회 기관지 ‘태극‘을 발행, 그 주간(主幹)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 계연수 사후 그에게 전수된 환단고기를 가지고 월남하였다. 이후 단학회(檀學會)를 단단학회(檀檀學會)로 개칭하였고, 1963년 대전에 정착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다(현재 단단학회 회장인 양종현은 1967년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유립을 약 20년간 모시면서 역사를 배웠다.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란 비난에 대해서 그는 환단고기 초간본을 좁은 방에서 스승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배운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며 결코 위작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이유립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吳炯基)였다. 오형기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환단고기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1949년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한 후 발문(跋文)을 써 붙였다. 그러나 책을 지은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인 발문을 오형기가 임의로 쓴 것에 대해 이유립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고 한다.
이 필사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이유립의 문하생 조병윤이 1979년에 서울의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에서 이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이다. 이른바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되었다(조병윤은 스승의 허락도 없이 자신을 발행인으로 하여 책을 출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판권에서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소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단단학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이유립과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오형기는 발문 파동 후에도 계속해서 단단학회 행사에 참여하였고, 이유립이 죽자 장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사태 수습 차원에서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다. 원고는 1979년 그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 발간하였다(이유립은 배달의숙본 환단고기를 가까운 지인에게 기증도 하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판매도 하였다. 한때 초간본으로 잘못 알려졌던 숙명여대 소장본은 언론인 송지영이 이유립에게 받은 10여권 중의 일부가 대학에 기증된 것이다(양종현 증언) 그 무렵 환단고기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는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검토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혀 줄 수 있는 책이라 여긴 것이 발단이었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는 아시아의 지보(至寶)라 극찬하고 자국의 정계와 재계의 후원을 끌어내어 1982년 ‘실크로드 흥망사’ 라는 부제를 붙인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출간하였다(환단고기를 번역 중이던 가지마 노보루는 박창암 장군(월간 ‘자유‘발행)의 소개로 이유립을 찾아와 당시 이유립이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여놓은 환단고기 원고 원본을 ’일구일획도 바꾸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빌려갔지만, 출판된 일본어판 환단고기에는 번역의 오류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왜곡된 내용이 많았다. 그후 이유립이 우여곡절 끝에 박창암을 통해 돌려받은 원고는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양종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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