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ion of jirisan cultural studies 지리산권 문화의 지방문화 특성을 통한 미래의 인문학적 가치 창출

자유게시판

2) 잊지말아야 할 과거사

임희빈 | 2014.06.27 13:28 | 조회 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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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일본어판은 환국-배달-고조선-고구려-대진국(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를 배달-야f마토일본-나라일본-헤이안시대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로 둔갑시켜 놓았다. 동방 한민족의 역사가 중동 유대족의 역사에서 발원하였다는 황당한 주장도 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유립과 임승국이 우리 고대사를 월간지 ‘자유‘에 수년 동안 연재해 오던 터라,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신교 문화가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쓴 환단고기가 한국에 역수입되어 소개되자, 한국 역사학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1985년 당시 고등학교 교사이던 김은수가 첫 번역서를 낸 이후 오늘날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환단고기 번역본이 출판되고 있다.
잃어버린 한민족의 시원 역사와 문화를 복구하려다가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계연수와 그의 스승 이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헌신하며 환단고기를 널리 알린 이유립! 이들은 한민족 사학의 아버지라 불러 마땅하다 하겠다.
환단고기 진위 논쟁
한국 사학계는 대체로 환단고기를 정식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환단고기를 시대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위서로 매도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환단고기의 출간 과정이 미심쩍다고 한다. 그들은 1911년 계연수가 간행한 원본이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 큰 혐의를 둔다. 이유립이 분실하였다는 원본이 보존되고 있다면 환단고기 위서 논쟁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립이 1979년(광오이해사본 출간 연도) 이전부터 월간지 “자유“에 기고해 오던 글을 모아 환단고기를 간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광오이해사본은 오형기의 필사본을 영인한 것이고, 오형기 필사본은 이유립의 소장본을 필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본이 만들어졌고(1949), 그 후 영인본이 나올(1979) 수 있었다. 따라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1979년 이후 대중에게 알려진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가지고 있던 계연수본이 재간행된 것임이 틀림없다.
위서론자들은 심지어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계연수 선생을 가공의 인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들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연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은 그 제자인 이유립의 증언과 여러 문헌에서 입증되고 있다(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그가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기록되어있는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1920)과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등이 있다.
위서론자들은 또 자유, 평등, 인류, 세계, 원시국가, 문화,문명, 개화, 부권(父權), 헌법과 같은 근대어가 쓰인 것을 빌미로, 환단고기를 일제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들이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꾸며낸 책이라 한다. 그런데 이 어휘들은 고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 자유는 ‘자기가 주인이 되다’라는 뜻으로, 평등은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어로서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자유와 평등도 그러한 뜻으로 쓰인 것이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나온 시선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에 수록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분함을 품고 있었는데, 네가 어찌 멋대로 할 수 있는가(吾意久懷忿 汝豈得自由)라고 하여 ‘자유’라는 어휘가 나온다.
인도 승려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된 금강경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편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 )라고 하여 ‘평등’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장자 지북유(知北遊)편에서 “생물은 이를 서러워하고, 사람은 이를 슬퍼한다(生物哀之 人類悲之)라 하여 ‘인류(人類)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당나라 때 한문으로 번역 된 능엄경의 ‘무엇을 중생세계라고 합니까(何名爲衆生世界)라는 구절에 ’세계‘라는 어휘가 사용 되었다.
주역 계사하(繫辭下)의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해 있을 때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집안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君子安而不忘危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라는 구절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국가‘를 확인 할 수 있다. ‘문’과 ‘화’가 결합된 문화라는 말은 고대에 이미 사용 되었으며, 문으로써 가르쳐 변화시키다(以文敎化)를 뜻한다.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을 보면,“선행을 상주고 간악한 행위를 벌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賞善罰姦 國之憲法也)하고 하여 ‘법’, ‘법전’을 뜻하는 ‘헌법’이 나온다.
백번 양보하여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사서가 천 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가 나온 지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묶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원래 다섯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계연수가 모은 다섯 권은 필사 과정에서 인물, 연대, 장소가 오착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에 가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들과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 될 수 는 없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보정조차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위서론자들은 또한 환단고기에 삼신, 삼신일체, 영혼 등 기독교 교리 용어와 유사한 말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환단고기는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 날조된 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삼신과 삼신일체(三神一體)는 한민족이 그 중심에 있었던 상고시대 신교 문화의 중요한 고유 술어이다. 우리의 고유한 문화 언어 삼신일체(三神一體)를 기독교의 술어 삼위일체(三位一體)와 혼동하는 것은 우리 상고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교 삼신문화의 역사관으로 역사관으로 한민족과 인류의 태고 역사를 기록하였음에도 이 땅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환단고기의 비운은 뿌리 문화가 말살된 한민족의 참담한 역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홍산문화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의 유적 발굴을 통해 서양문명의 뿌리인 수메르문명이 세상에 드러난 것에 필적하는, 20세기 동북아 최대의 발굴 사건이 있다. 요서지역(발해연안 지역)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 발굴이 바로 그것이다.
요서 지역 발굴은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내몽골 적봉 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것으로 시작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2006년 6월에도 거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의 초모산(草帽山) 유적지에서 5500년 전 적석총군이 발견되었다(2006.6.10 중국CCTV보다 내용).
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BCE 6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하서문화이다. 현지인조차 길을 헤매는 오지에 위치한 소하서 유적은 당국의 문화재 신고 정책에 따른 주민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은 이 문화를 단지 ‘인류 최고最古의 신석기 문화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소하서 유적은 BCE 6000~BCE 5000경에 만들어진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와 그 연대가 일치한다. 그리고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는 그 재질과 모양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다. 이것은 소하서 문명의 주인공들과 동방 한민족의 강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발견된 지명을 따서 이름을 붙인,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가운데 세간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곳이 바로 홍산문화이다. 적봉시에 위치한 철광석으로 뒤덮인 붉은 산 ‘홍산紅山’에서 이름이 유래한 이 문화는 ‘석기와 청동기를 섞어 사용한 BCE 4500~BCE 3000년경의 문명으로 판명되었다.
홍산문화는 1979년 객좌현 동산취촌 발굴과 1983년 그 인근의 우하량촌 발굴을 계기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산취에서는 엄청난 제사 유적이 발견되었고, 우하량에서는 돌무덤신전, 제단이 동시에 발굴되었다. 그것은 다른 신석기문화에서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은 적석총(돌무지무덤)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고대로부터 삼국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무덤 형식으로 황하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이다. 충적층 지대인 황하지역에 살던 화하족(현 중국 한족의 조상)은 흙으로 만든 토광묘를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 지역에 살던 동이족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BCE 4천 년대에 돌무덤 묘체를 쓴 요서의 동이족은, 환단고기에 의하면 모두 배달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홍산문화가 환단 시대의 동이족이 일군 문화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다. 이형구 박사는 홍산인들이 여신을 모신 사당을 지어 지모신地母神에게 제사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多産을 기원했다고 말한다. 여신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한 홍산인들을 환단시대와 연관 지을 수밖에 없는, 환단고기가 전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배달 시대 초기, 호족과 웅족이 환웅을 찾아와 환족으로 교화되기를 청하였다. 호족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남권 중심의 사나운 부족이고, 웅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여권 중심의 우매한 부족이었다. 삼신의 도를 깨우쳐 광명 민족이 되기 위해 수행에 들어간 두 부족 가운데, 웅족만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 무사히 수도생활을 마치고 환족이 되었다. 고고학 현장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문헌이 기록한 역사를 종합하면, 홍산문화는 환단의 문화로 귀결된다.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 ‘사상 처음’이고 ‘최고最古’인 이 홍산문화를 중국 학계와 정부는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오랑캐 땅이라 치부하던 만리장성 이북에서 발견된 문명을 황하문명의 원형으로 규정하게 된 난처함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다민족 역사관을 내세웠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 땅에서 발견되는 소수민족 문화는 모두 중국 문화라는 것이다. 황하문명보다 훨씬 일찍 태동하여 동북아문명의 기초가 된 환단의 문화가 중국 문화로 둔갑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널리 대중화 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이다. 그런데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 초간본을 왜 굳이 1980(경신)년에 책을 공개하라고 하였는가. ⇒ 1911년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였다. 또한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桓檀古記』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桓檀古記”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출처: 상생출판사에서 발행한 “桓檀古記”에서 부분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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